in 리뷰

아픈사랑 '블라인드'

눈이 먼, 보지 못하는

다감이 김금주

다감이 김금주

소공연장 입구 전경공연이 펼쳐졌던 울산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입구 전경

울산문화예술회관은 올해 초 대학로에서 호평 속에 막을 내린 연극 '블라인드'를 초청해 3월 30일과 31일, 양일간 소공연장에서 무대를 올렸다. 서울공연 당시 캐릭터에 대한 뛰어난 해석과 연기력을 보인 전 출연진이 울산을 찾았다. 연극 '블라인드'는 동명의 네덜란드 영화의 원작을 무대화한 작품으로 시각을 잃은 후 세상과 단절된 청년 '루벤'과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여자 '마리'가 만나 마음으로 서로를 느끼며 진정한 교감을 이루는 이야기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그린다.’고 했다. 가장 분명해 보이는 시각보다 청각, 촉각, 후각 등 다양한 자극을 통해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그 대상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만져야 볼 수 있어.”라던 루벤은 마리가 읽어주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듣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함께 하는 행복을 알게 된다. 눈을 감았을 때 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연극은 마리의 대사로 시작되고, “지금부터 잘 들어 보세요. 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마리의 편지로 끝이 난다. “루벤, 가장 아름다운 건 네 손끝으로 본 세상일거야. 가장 순수한 사랑, 진실한 사랑은 결코 보이지 않아. 영원함도 그렇고.”

줄거리는......
'블라인드' 공연장면 - ㈜나인스토리 제공 '블라인드' 공연장면 - ㈜나인스토리 제공

시간과 때를 알 수 없는 외딴 곳의 큰 저택, 그 곳에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와 후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루벤이 살고 있다. 그는 무척 난폭하고 어머니는 그러한 루벤을 위하여 책을 읽어주는 사람으로 마리를 고용한다. 마리는 어릴 적 학대에 얼굴을 비롯한 온 몸에 유리로 베인 흉터가 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 범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루벤은 마리로 인해 마음의 평정을 찾고, 마리가 아주 아름다운 처녀일 것이라고 상상하며 마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마리역시 루벤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중 루벤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고, 루벤은 수술을 받게 된다. 번민 하는 마리. 루벤의 수술 날, 마리는 한 장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두고서 떠난다. 루벤은 시력을 되찾았지만 마리는 사라지고 어머니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몇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시내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리와 만나게 되고, 본능적으로 마리를 알아본 루벤은 마리의 외모에 개의치 않고 함께 할 것을 원한다. 하지만 주위사람의 눈을 두려워한 마리는 떠나 버리고, 마리가 남긴 편지를 읽은 루벤은 스스로 눈을 멀게 한다.

영화적 상상력을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영화 '블라인드' 포스터영화 '블라인드' 포스터

2007년 개봉된 영화는 국내 미개봉작임에도 입소문을 타고 지금까지도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영화를 제한적인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원작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완벽하게 충족시켰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음악적 분위기로 또 다른 ‘블라인드’를 보여주었다.
커튼과 무대의 단차를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주고 3인조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와 바람 소리, 이명 소리 등으로 영화에서 느끼는 각기 다른 시공간을 만들어냈다. 영화에서 엔딩3분은 이 3분의 장면을 위해 90분을 달려 온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강렬하다. 연극에서는 영화의 영상미를 배우의 연기로 채운다. 루벤은 모든 것이 정지 된 무대 끝에 걸터앉아 마음으로 느낀 아름다움을 손으로 그리며 미소 짓는다.

전시 '블라인드' 공연장면 -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은 입체적이다. 관객 속에서 마리가 등장하고 관객의 작은 탄성마저 특수효과가 된다. 영상미로 기교를 부리는 영화와는 달리 침대, 책장, 거울, 피아노의 단순한 무대 소품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거울은 진실한 사랑으로도 표현되고 마리의 상처로도 표현된다. 관객은 집중할 수밖에 없다.

상처와 결핍을 치유하는 사랑......
'블라인드' 공연 후 커튼콜 '블라인드' 공연 후 커튼콜

루벤과 마리는 각자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난폭한 루벤 에게 마리는 말한다. “넌 특별하지 않아. 단지 눈이 안 보일 뿐이야.” 정곡을 찌르는 마리의 말에 루벤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자신 주변에도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다. 자신 안에 숨어 있던 두려움을 위로하고 채워주는 마리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리역시 자신의 흉한 모습을 볼 수 없는 루벤 앞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닌 그냥 고운 목소리를 가진 예쁜 여자가 된다. 아마도 루벤과 마리가 느끼는 안정감은 사랑을 할 때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배려일 것이다.

나는 단지 눈이 안 보이고, 단지 몸이 불편하고, 단지 마음이 힘든 것뿐인데 나의 진짜 모습을 보아 주세요 하는. 우리 모두는 상처 하나씩 가진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루벤이 시력을 되찾고 나자 서로의 결핍과 결여에 균열이 생긴다. 마리가 볼 때 루벤 에게 더 이상 자신이 보듬어 줄 결핍이 없어진 것이다. 깊은 사랑은 아픔이나 상처로 인해 결핍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상처를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채워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마리가 알았다면 떠나지 않았을까. 루벤이 눈을 찌른 것은 자신이 생각한 진정한 아름다움을 다시 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마리를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문화예술회관에서 목화예식장까지 이어지는 왕생이길의 야경은 연극의 여운을 가지고 산책하기에 최적이다. 둘이 함께 하길 원했는데, 보이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마리야말로 청맹과니가 아닐까. 나는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눈을 감고 더듬어 보면 잊고 있었던 진심이 떠오를까.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 아이러니라니.
루벤! 왜 그랬어.
마리! 왜 그랬어.

'블라인드' 공연 후 커튼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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