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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구강서원 이야기

다감이 윤경희

다감이 윤경희

지난 8월 29일 울산 유일의 사액서원 구강서원(鷗江書院)서 서재(西齋) 준공식이 있었다. 준공식에 앞서 서원 전례위원 60여 명과 예림회 회원 다수가 참여하여 성현 두 분께 서재의 준공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연일 계속 되던 폭염이 한풀 꺾이긴 했으나 여전히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예복을 갖춰 입은 유림들과 예림회 회원들이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신축된 서재 앞에서 의식을 행하는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원은 학문연구, 강학(講學), 교화를 위한 향사(享祀)에가 그 역할이었다. 구강서원에는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을 성현으로 모시며 이를 봉안하여 매해 음력 2월과 8월에 향례를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포은 선생은 본래 고향이 영천이나 고려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재임 시 권신 이인임의 외교정책 배명친원(排明親元)을 반대하다 울산 언양으로 2년 반 동안 유배되었는데, 그때 울산 원근 향촌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에게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을 크게 끼쳤다고 한다. 회재 선생은 조선 중종 때 성리학자로 퇴계 이황의 이기론(理氣論)에서 이(理)우위론에 큰 영향을 주어 퇴계는 그를 동방의 사현 중 하나로 추모하였다. 또한 경상 관찰사를 역임할 당시 울산 원근(遠近) 지역에 성리학 학풍의 영향을 끼쳐 울산 향촌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고 한다.

서원은 크게 선현에 배향하는 사당(祠堂),과 학문을 토론하고 배우는 강당(講堂), 그리고 학생들이 숙식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갖추는 것이 일반적인 구조라고 한다. 그런데 구강서원은 사당인 숭도사(崇道司), 강당인 지선당(止善堂)과 부속 건물을 갖추고 동재, 서재는 갖추지 못했다. 이는 복원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서재의 준공은 서원의 온전한 복원을 바라던 사람들의 염원에는 못 미치나 오랜 기간 숙원 사업 중 하나가 해결되었다는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본래의 구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고(1871년) 선현의 위폐는 매안(埋安)했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현재 동천강 옆으로 아파트가 들어섰다고 한다.(반구동 290-2번지)

오랜 시간 잊혔던 구강서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에 매안지 일대가 주택지 개발로 매각되었고, 이를 알게 된 정운조, 김윤준 등 주민들과 포은선생 종약원(宗約院), 회재선생 숭모회(崇慕會)가 주체가 되어 ‘구강서원 복원 추진회’를 결성하면서 부터였다. 이들은 3년간 ‘위폐매안지’ 보존과 ‘서원복원’의 역사성과 당위성을 명분으로 법률적 대응을 했으나 실패했고, 선현의 위폐는 울산향교 서무(西廡)에 옮겨 봉안되었다.

구강서원 복원 추진회는 이에 주저앉지 않고 구강서원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영향을 끼쳤던 문중 사적이 기록된 구강서원 원록(院錄), 고왕록(考往錄), 울주부 향안(鄕案) 등을 살려 기관과 언론에 알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3년 3월 15일부로 본래 위치는 아니나 울산 중구 서원11길 45에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훼철된 지 132년 만, 복원추진위 결성 15년 만의 성과였다.

※ 자세한 내용은 <구강서원지(鷗江書院誌)> 참조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울산은 산업전진기지로서 그 어느 곳보다 대대적인 변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겪었다고 본다. 고대유적인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미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어 선대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지만 울산의 정신사적 유적은 타 지역에 비해 그 맥이 너무 희미하다.
다감이도 이 지역에 직장을 따라 들어와 30년 넘게 살았지만 서원이 도시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받았던 낯선 느낌이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있다.

다감이의 고향은 경북내륙으로 가끔 그곳을 찾을 때면 발길 닿는 곳마다 선조들의 정신이 아직도 날을 퍼렇게 세우고 근본 없는 자 같은 행보를 나무라는 듯 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정신유산이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 구강서원의 서재 봉향 고유제 전경1
  • 구강서원의 서재 봉향 고유제 전경2

구강서원의 서재 봉향 고유제 전경

이번 서재 봉향 고유제를 통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울산에도 학문을 숭상하고 정신문화의 가치를 계승하고 보존하려 애쓰는 예향의 맥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인을 통해 구강서원지(鷗江書院誌)를 얻어 읽게 되었는데 해당지에 서원의 발의부터 건원, 훼철에서 복원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의 화폐나 시대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도 있어 재미있기도 했지만 오늘날 구강서원이 있기까지의 역사에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엄숙함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선조들의 행보에서 얼을 바로 세우고자 애쓴 흔적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구강서원의 내력을 간단하게나마 옮겨보고자 한다.

울산지역의 학풍은 구강서원에 봉향된 두 선현의 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구강서원에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 선생과 회재 이언적 선생은 본래 울산에 적(籍)을 두지 않았다. 울산은 해읍(海邑)으로 향토출신 유학자가 거의 없었고 왜구를 막기 위한 수륙군진(水陸軍陣) 기지였기 때문에 역대 수령 가운데서도 사림 출신보다 무반(武班)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울주지역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던 포은선생과 울산에 이웃해 있는 회재선생을 선현으로 모시게 되었다. 서원 창건이 인근의 경주나 밀양보다 다소 늦은 또 다른 이유로는 임진왜란까지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의 형성이 늦다보니 성리학적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던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구강서원 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등으로 이루어진 대다수 재지(在地)기반의 향중사림(鄕中士林)들의 공동발의(1659년 2월)로 시작되었다.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조성한 기금을 기초로 물자 무역을 통해 서원건립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건원하기까지 부지선정의 어려움과 두 차례의 화재, 출자미(出資米)를 한재(旱災)로 인해 고통 받는 지역민들을 위해 진휼미(賑恤米)로 내놓고 난 후 기금고갈 등 난황을 겪었다고 한다. 이렇게 기술한 것 외에도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9년만인 1678년에 창건했다고 하니 그 의지와 내력에 탄복하고 말았다.

이전해온 현재 구강서원 전경

이전해온 현재 구강서원 전경

구강서원은 울산에서는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서원은 향촌유림들에 의해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享祀)적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이 있어 특전을 부여했다.

구강서원은 창건하고 4년 후부터 16년 간 네 차례에 걸친 청원상소 끝에, 1694년 3월 9일 비로소 서원 명칭을 부여한 어필(御筆)의 편액과 함께 학전 3결, 서적, 노비 등을 받아 권위를 인정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건원 발의부터 사액서원이 되기까지 무려 35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선조들의 굳은 의지에 고개가 숙여진다.

200여 년간 울산지역의 정신적 토대 역할을 했던 구강서원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령의 서리를 맞고 1871년 훼철의 불운을 당하게 된다.
당시 훼철 기준인 '미사액서원' 여부, 제향자 후손의 주도로 인해 민폐발생 여부를 선별했던 시점은 무사히 넘겼으나,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의‘1人 1院(1인 1원)’의 기준에서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과 겹쳐 훼철되었다고 한다. 숙종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서인이 집권하고 첩설(疊設)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구강서원도 위기를 맞게 되는데 한재(旱災) 때 진휼(賑恤)과 거금을 들여 무너진 제방을 보수한 일 등, 향촌사회에 기여한 덕에 훼철은 면했으나 고종에 이르러서는 결국 불운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강서원의 존재는 인근주민들 말고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시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외지인인 이유도 있겠지만 울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평을 부르짖는 사회에서 수직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사원의 존재야 흘러간 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할 것이고, 이어져야할 정신적 유산이기보다 타파해야 할 중세유산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이런 마당에 서원의 전각 하나 건립한 일이 무슨 대수겠는가. 취재 전 본 다감이의 생각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취재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구강서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예절교육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정양자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구강서원은 이 지역 유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어요. 여기서 모여 배우고 토론하고 제사를 통해 선현들의 정신을 잇고자 했지요. 조상을 안다는 것은 내 근본을 안다는 것이에요. 뿌리를 내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어요. 하물며 사람인데 더 말할 거 있나요. 뿌리가 없이 떠도는 삶이란 가벼울지는 모르겠지만 허망하기 그지없지요. 나의 존재가 수천 년을 올라간 그곳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삶을 살 수 없지요.”

지금도 구강서원에서는 사람들이 그 존재를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두 선현에 분향의 예를 올리는 것은 물론, 일 년에 두 차례 음력 2월과 8월에 향례를 행하며 선조들의 정신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한자와 한문 경전 강학과 주부를 대상으로 예절교육을 실시하고 외부 의뢰를 받아 청소년 인성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구강서원 서재 건립 준공식 전경

구강서원 서재 건립 준공식 전경

요즘 국제결혼으로 인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문화차이로 인한 갈등이 심각함을 인지하고, 다문화 가족을 대상으로 한국 전통문화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타 지역에 있는 여러 서원들은 그저 지난 시대의 유적으로 존재가치를 지니는데 반해 구강서원에서는 지금도 강학과 향사가 계속되고 있어 본래의 기능을 잃지 않고 있는 덕분에 지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인성교육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데 요즘 청소년들은 어른보다 바쁜 것 같아요. 입시위주의 교육적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죠.”

요즘은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것을 개탄하는 소리가 있다. 아마도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탄식이 아닐까. 아이는 아이답고 어른은 어른다운 사회, 윗대의 정신이 자연스레 아래로 흘러 그 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정신이 살아난다면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지역사회의 어른의 역할을 구강서원이 담당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자료출처 : <구강서원지>, <석전가족> 제7호, <울산의 구강서원과 사액서원>(구강서원 전임강사 정양자)
- 도움 주신 분 : 정양자님, 신정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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