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인물

70년 춤 춘 것이 뭔 자랑이라고요

- 전통춤 춤꾼 이정자 -

다감이 김금주

다감이 김금주

여든 셋의 노구는 신명나는 장구장단에 소매깃으로 활개를 치며 빙빙 돈다. 부채 잡은 손과 팔의 들림이 예사롭지 않다. 자연스레 다스리는 치맛자락까지 일렁일렁하다. 10분간 계속된 이정자 씨의 부채춤이 가라앉자 요양병원의 환자들은 잠시나마 기력을 찾고 박수를 쳤다. 부채를 든 그녀는 날아다녔다. 영락없는 노름마치다.

부채춤

최근에는 병원 등 봉사활동을 통해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는 이정자氏

사진 박동진 명창

스승 박동진 명창(右)과 함께 기념 촬영한 이정자氏(中)

울산의 춤꾼 ‘이정자’하면 낯선 이름이지만 그녀는 故 박동진 명창이 아끼던 제자이고 한국무용의 대가 김백봉 선생에게 사사 받은 춤꾼이다. 이어서 그녀의 제자는 무형문화재인 김은자氏를 비롯해 대구의 향토춤꾼인 황정환氏 등이 있다.

이정자氏에게 무용과 설장구를 배운 김은자 씨는 공연마다 팸플릿 밑에 ‘사사 이정자 선생님’라고 넣고 초대장을 보낸다. 그녀의 팔순잔치도 2017년에 제자들이 주관해서 대구에서 무용제 형식으로 차려주었다.

그녀는 193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짙은 화장만 보면 속 시끄러운 할머니 같아 보이지만 잠깐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이 예사 어르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움이 짧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전화를 했을 때 “70년 춤 춘 것이 뭔 자랑이라고. 다 지난 일입니다.” 라며 한사코 오지 말라고 하셨다.

전통은 케케묵은 것이 아니라 켜켜이 묵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전성기를 지나 아무도 찾지 않는 춤꾼이지만 온몸에 켜켜이 남아있는 춤으로 간을 보고, 시간을 거슬러 재인(才人)의 삶을 더듬어 보았다.

팔순기념사진

제자들이 준비한 덕에 함께 팔순을 기념한 이정자氏(2017)

그녀의 이야기
나한테 들을 이야기가 뭐 있다고요. 내 스승님들이 훌륭하고 제자들이 잘하고 있으니 그들 자랑은 삼아도 내 이야기는 뭐 내세울 것이 없어요. 나는 허튼춤만 추지. 내 장구장단이 좋다고 나를 데리고 다니는 박현성 선생이 더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인데요. 내 스승님이나 제자들 이야기, 춤 이야기라면 부끄럽지만 할 것이 있어요. 오래 된 이야기요.
내 이름은 ‘이정자’요, ‘김태은’입니다
춤이 그냥 좋았어요. 젤로 좋았소. 어릴 때부터 남사당패가 오면 미쳐서 쫓아다니고 동네잔치마다 가서 남의 집서 창을 하고 춤을 하도 추니까 집에서 쫓겨났지. 미쳤다고요. 우리 집이 안동이고 내 본래 성이 안동 김 씨요. 본명이 ‘김태은’이지요.
시골 깡촌에 보수적인 지역이라 춤은 기생이나 추는 거라고 알던 집이었어요. 아버지가 춤 출거면 호적에서 판다고 하시더니 정말 파십디다. 그때는 호적도 쉽게 파고 올리고 그랬어요.

집에서 쫓겨나고 찾아갔던 분이 전라도에 계시던 박동진 명창이었어요. 내 나이 열다섯 이었어요. 기도 안차죠? 다행히 내 재능을 알아 본 선생님이 사연을 듣고는 이름을 ‘이정자’로 지어주셨지. 그래서 지금까지 춤꾼으로는 ‘이정자’요. 호적에는 ‘김태은’입니다. 이름을 찾은 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였어요. 수소문해서 부르시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제 이름을 찾으라 하더라고요. 아버지 소원 들어 드린다고 다시 ‘김태은’이 되었지만 나는 ‘이정자’여요. 춤꾼 ‘이정자’.
박동진 명창과 함께

박동진 명창(中)과 이정자氏(右)

지금 같으면 아이돌이 되었을 터인데
나도 내 팔자가 이해가 안 됩니다. 집도 시골치고 꽤 살았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 같으면 아이돌이 되었을 것이요. 당시에 내로라하던 명창 박동진 선생님이 키워주셨으니까요. 처음에는 창을 했는데 결절이 와서 목소리가 변하자 돌아오질 않더라고요. 그 때 부채춤의 창무자인 김백봉 선생님이 무용을 가르쳐주셔서 지금까지 춤을 추고 살고 있어요.

우리 스승님들은 연구도 하시니까 부채춤, 도살풀이춤 대가로 불리는데 나는 부끄러워요. 취미 수준이라서 다 조금씩 춥니다. 한량무, 도살풀이, 부채춤, 무당춤, 처용춤, 오고무, 살풀이춤 등등 다 추지요. 제자들 가르칠 때는 창작무용도 했습니다. 그 중에도 한량무, 부채춤, 도살풀이춤을 주로 춰요. 우리 춤은 그냥 춤만 추는 것이 아니고 춤에 이야기가 있는 거라 연기도 필요해요. 요새로 치면 아이돌 맞지요?
사진 공연모습

한량무 (左) / 1978년도 일본 공연(渡日)을 앞두고 열린 발표회 팸플릿 (右)

여성국극단에서 이십대를 보내다
여성국극단에서 왕자 역을 맡은 모습

여성국극단에서 왕자 역을 맡은 모습

내가 여성국극단 출신이에요. 박동진 선생님의 권유로 들어갔는데 전쟁 전후로 여성국극단 인기는 대단했어요.

그중에도 대구에서 활동하던 임춘앵 선생님의 국극단이 인기가 아주 많았지요.
내가 창단멤버인데 주로 왕자 역할을 했지요. 헌데 그것도 60년대 이후에 영화가 인기가 많아지니 국극단 인기가 시들해져 점점 수입이 줄더라고요. 모든 게 흥망이 있습디다.

그래도 국극단 활동으로 이름을 좀 알려진 덕에 대구에서 ‘이정자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제자들을 키웠어요. 해외공연도 많이 다녔고요.
그렇게 저렇게 좋았던 시절도 많았지만 지금도 좋아요. 다 비우고 홀가분해서.
사진 공연모습
보고 싶은 사람은 다가고, 남은 건 춤뿐
춤에만 미쳐 살았던 것 같지만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대구에서 무용학원과 공연을 함께 하던 때였죠.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는데, 잠깐이었고 그 사람이 떠났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춤이 시들했던 적이 있었어요. 학원도 접고 있던 때에 울산에서 유명한 故 이척 선생님이 같이 일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울산에선 오고무 추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찾았던 게 이어져서 ‘이척 무용연구소’에서 같이 문하생들을 지도하기도 했지요. 울산에서 이척 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울산에 숨어살다시피 했을 그 때 박동진 선생님이 돌아가셨어요. 나한테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잖아요.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린 날 일겁니다.
그러다가 2009년에 이척 선생님마저 돌아가셨어요. 보고 싶은 사람은 다 갔어요. 이제 나도 너무 늙었고. 그나마 춤 출 기운이 있으니 이래 살고 있습니다.
울산 처용무

처용축제에서 시청 직원과 처용무를 추고 난 후 촬영한 기념사진

무대에서 춤추다가 가고 싶습니다

대구에 있는 제자들은 저더러 대구로 와달라 하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거기로 오라 하지만 나는 울산이 좋아요.

지금처럼 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춤추다 무대에서 가고 싶어요. 잘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연립주택에서 혼자 살지만 힘들지는 않아요.

아직 제자들이 찾아주고 다리에 힘이 있으니 고맙지요. 문풍지봉사단과 함께 복지회관이고 축제하는 곳이고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다 찾아갑니다. 이 늙은이 춤 봐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평생에 진 업보가 있다면 이냥 저냥 춤으로 봉사하며 풀고 가고 싶습니다.

사진 장고교실

장고교실에서 신명난 이정자氏

축제 공연모습

축제 공연에 참여한 이정자氏(중앙)

이정자氏를 만나고 오는 길,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춤추면 기생된다고 하던 시절에 태어나 넘쳐나는 끼 때문에 다난한 인생을 살아온 이정자氏. 우리 춤의 전승을 위해 원로 춤꾼의 과거사가 이런 글로나마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떼를 써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배려가 되기를......

무대에서 춤추다 가고 싶다는 이정자氏의 고독이 사라질 때까지, 춤을 출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송구한 마음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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