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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 그 곳을 아십니까

다감이 윤경희

다감이 윤경희

요즘 방어진 사람들은 경제뉴스 접하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경기불황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끝없이 추락하다 근래엔 아예 거래마저 뚝 끊겼다고 합니다. IMF 때도 까딱없던 방어진의 경기가 바닥으로 추락 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옷깃을 여미고 몸을 웅크립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활기를 잃어가고 불야성을 이루던 상점가도 빈 점포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방어진은 한때 전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으로 타 지역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방어진 사람들은 최근 불어 닥친 경기한파가 더욱 혹독하게 느껴집니다. 자존감이 떨어져 내일의 희망을 꿈꾸기가 어려운 때, 동구지역을 일컫는 방어진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해 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다모퉁이海隅蒼生의 백성
‘속담에 울산을 알랴거든 방어진(方魚津)을 보라하얏다.’ <개벽38호, 1923년 8월>

울산의 역사·문화적 궤적은 방어진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지요. 방어진의 지명은 그 뜻에 있어서 많은 변천을 거쳤습니다. 고려중기 호적단자에는 ‘防禦陣’으로 표기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는 진지’라는 의미를 지녔고, 조선시대에는 ‘魴魚津’(1469년 경상도속찬지리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23), 일제강점기(1928년 울산시군세일반)에는 ‘方漁津’ 등으로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달리 쓰였다고 합니다.

  • 방어진항 성어기(1910~20)
  • 방어진항 성어기2

1910 ~ 1920년대(일제강점기) 성어기를 맞았던 방어진항 풍경

현재 방어진은 방어진항 주변을 일컫는 지명이지만 과거에는 동구지역 전체를 지칭했습니다. 말을 기르던 목장의 흔적과 주전 봉대산 봉수대로 미루어 보면, 방어진은 국토방어의 최전방기지였으며 어항의 전진기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이 있어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방어진은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살기를 꺼려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사령장을 받아 부임한 부사가 경주에 머물렀다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일까요. 임진왜란 당시 소모진召募陳 지역으로, 주민들이 모두 떠났다가 전쟁 후 돌아온 사람들은 이 지역에 재산이 있는 주민들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개선하기 위해 당시 울산부사 박명부는 상소문‘울산민폐소’를 작성하여 ‘바다모퉁이의 백성海隅蒼生들의 앞날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원을 올렸다고 합니다. 갑오경장 이후 일본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 방어진 지역에는 30여 가구가 살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습니다.

방어진항

방어진항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남방부고南方富庫 방어진

방어진에는 역사적으로 세 번의 대규모 인구유입이 있었는데, 처음 이곳에 몰려든 사람들은 일본 히나세日生 지역 사람들이었고, 1908년 ‘한국어업법’이 발표된 직후였습니다. 이 법은 조선의 강이나 하천, 바다에서 일본어민들의 어로채취 행위를 보장하였습니다. 물론 조선 사람들도 이 법에 따르면, 일본에서 어로채취 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기잡이할 여건이 되지 않았으니 알고 보면 이 법은 순전히 일본에게만 유리한 불평등 법이었죠.

방어진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동해안을 끼고 있어 어종도 다양하고 그 수도 많았습니다. 어로 장비가 허술했던 당시에도, 하룻밤에 삼치를 3000마리나 잡았다고 하니 방어진 앞바다를 일컬어 ‘물반 고기반’이라는 말이 나돌 지경이었습니다. 방어진은 국내 3대 어장으로 성장할 정도로 어업이 번성했고 방어진 항구는 고기잡이배나 물고기 운반선으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습니다. 또한 그에 따르는 통조림 가공공장, 금융조합이나 조선상업은행 지점, 방어진우편국 등 많은 공공시설과 생활편의시설도 들어섰습니다. 그러자니 ‘청루골목에 샤미센(일본 전통 현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똥개도 지전을 물고 다녔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청루골목>

방어진 청루골목의 모습

그러나 그 모든 달달한 열매는 일본인들이 누렸을 뿐 조선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치던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내륙의 조선인들이, 소문을 듣고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방어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의 삶도 팍팍하긴 마찬가지여서 조선인들이 온갖 허드렛일에 자신들의 노동을 팔아 얻는 대가는 생선 내장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으로 젓갈을 담아 생활했다고 해요.

일본은 방파제나 접안시설을 만들거나 길을 닦고 근대식 건물을 세운 것을 근거로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땅에서 우리 자원으로 배불린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못에 대한 반성 없이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려 드는 일제에 대한 울분이 조선의 위정자들을 향하기도 합니다. 정치가 제대로 서야 백성이 편안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귀환동포와 피난민의 삶터로 다시 일어서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떠나자 항구나 마을, 거리가 텅 비게 되고 방어진은 ‘망어진亡魚津’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역 경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배와 어구를 모두 챙겨 떠나고 난 뒤, 어로행위의 변방에서 허드렛일만 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낭패감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25 전쟁이 터졌고 보도연맹에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방어진의 인심과 경기는 바닥이었다고 합니다.

어시장 준공식>

방어진 어시장 준공식 모습(1968)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부산과 함께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없어,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피난민들로 인해 방어진은 두 번째 대규모 인구유입이 일어났습니다. 땅은 좁고 먹고 살만한 경제 기반은 없었지만 저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 있어 방어진은 다시 활기를 띠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 나포되었던 러시아 배를 사와 ‘포경선’을 만들어 고래잡이에 나섰고, 비어있던 철공소를 다시 세워 목선을 만들어 지역경제 살리기에 힘썼다고 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장세동 씨는 전해주었습니다.

고래 해체>

1964년도 동진해안 풍경

산업화의 개막, 근로자들의 삶의 터전 방어진

방어진에 세번째 인구 유입은 산업화 시대의 개막과 함께였습니다. 방어진 백사장에 현대중공업이 들어오면서 이곳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근로자들을 수용하느라 당시, 집 짓는 사람들 치고 한몫 못 챙긴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집을 짓는 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팔렸으니까요.

저는 지금도 꿀벌들처럼 방 하나에 부엌 하나씩을 낸 셋집에 옹기종기 살았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현대중공업에 취직한 남편을 따라 울산에 왔지만 회사에서 공급하는 사택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습니다. 애써 얻은 셋집이 준공도 마치지 못한 이층 주택이었어요. 주택이 턱도 없이 부족했던 때라 집주인의 위세도 대단했답니다. 아이 둘 있는 사람에게는 세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내 집 마련에 허리띠를 졸라맸지요.

월급날이면 전국 각지의 보따리 장사치들이 난전을 펴는 바람에 대로변을 비롯해 골목까지 떠들썩했답니다. 집집마다 고기 굽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웠고 비록 좁은 집에 살았지만 온갖 가전제품에 오디오시스템과 대형수족관까지 들여놓았던 집이 많았지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지은 집은 햇빛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희망을 굳이 꿈꾸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방어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변화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기는 했지만 한편 정서적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장기를 함께 했던 마을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그때의 공간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겠지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기억과 맞닿는 공간을 만나면 왜 그렇게 반가운지요. 지역사연구소장 장세동 씨는 소년기를 떠올리며 말합니다.

“지금은 교육연수원 자리는 예전에 방어진수산중학교가 있었어요. 러일전쟁 당시 일제의 군사요새였는데 일제가 물러가고 병영숙소였던 건물이 교사가 되었어요. 무기고는 숙소와 좀 떨어져 있어 음악실로 사용했는데 그곳에서는 난리굿이 나도 몰랐지요. 주전과 남목에 살던 학생들이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지만 지각하는 학생들은 오히려 학교 가까이 살던 애들이었어요. 그런걸 보면 모든 것은 정신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하나도 없어 안타깝습니다.”

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방어진의 과거를 돌아보자니 제가 유소년기를 보냈던 태백시가 떠올랐습니다. 그곳을 떠나온 지 25년 만에 찾아갔더니,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인구 20만을 바라보던 곳이 5만으로 줄어들었더라고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빈집들이 매미허물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시의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한 인문적 자원과 자연자원을 이용한 관광레저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18만을 바라보던 방어진 인구가 조선업 경기 하락으로 지금은 1만 명가량이 줄어들었습니다.(16만9천명, 2017.12. 기준) 빈집이 늘어가고, 지역상인들은 발길이 뜸해진 손님들을 기다리며 한숨을 내쉽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어진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던 역사를 품고 있는 지역입니다. 해안을 끼고 펼쳐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잘 가꾸어낸다면 생태문화관광 지역으로 새로운 도약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요.

후기

2018년도 들어 (재)울산문화재단 웹진에서는 '염포'와 '장생포'에 이어 '방어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 보았습니다.
과거에서 이어지는 현재, 그때를 기억하며 또 새로운 시간을 밟아가는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침 울산박물관에서는 <방어진, 파도와 바람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라는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다고 하네요. (2018. 10. 2. ~ 2019. 2. 24.)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박물관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이 이어질까요?

방어진 전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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