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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탁 시인 인터뷰

다감이 윤경희

다감이 윤경희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던 태양의 기세도 시간 앞에 무릎 꿇고 몸을 낮추었습니다. 들판에 벌레소리 요란하고 나뭇잎도 하나둘 저녁노을 빛깔을 닮아가는 중이네요. 욕망에 불타올랐던 지난여름을 반추해보면 나의 몸짓이 덧없었다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밖으로 보냈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안으로 갈무리할 때가 되었나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지난여름, 내면의 우물 긷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인의 가을은 어떤 것일까요.

올 시월에는 시를 짓다가 책을 만들고, 그러다가 또 시에 곡을 얹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유정탁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인의 작업공간인 ‘애령’을 찾았습니다.

다양한 활동으로 시심을 펼치는 선생님 반갑습니다. 간단한 이력을 부탁드립니다.

시 쓰는 사람 유정탁입니다. ‘작가시대’를 경영하고 틈틈이 시노래도 만듭니다. 서정시를 주로 썼고 시집으로는 등단 12년 만에 낸 첫 번째 시집 『늙은 사과』과, 뒤이어 『버드나무 여인』을 냈습니다. 시노래는 20여 곡 발표했고 음원 등록된 것으로는 14곡 있습니다.

1998년 서른 살에 ‘전태일 문학상’으로 등단하셨고 2011년 마흔 세 살에 첫 시집 『늙은 사과 』를 내셨던데요. 유정탁 님의 자세한 문학적 이력이 궁금해요.

어릴 때, 고향 거창에서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였지요. 눈 뜨면 놀 거리가 널려 있으니 공부는커녕 책 하고도 담 쌓고 지냈어요. 13세 때 거창을 떠난 이후,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면서 비교적 조용한 사람이 되었죠. 고등학생 시절에는 정말 학교에 가기 싫었어요. 공부에는 도통 흥미가 없었으니까요.

졸업 후, 1987년 노사분규가 한창일 때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는데 문학과 인연을 맺은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지(知)와 사랑』을 읽었는데 그게 제 감수성에 맞았는지 그때부터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모두 찾아서 읽었어요.

시인 유정탁

시인 유정탁

그 중에 『향수』가 가장 좋았어요. 이후로 책과 가까워졌죠. 세계 명작을 그때 다 읽은 것 같아요. 탐독증에 걸렸다고 할까요. 머리맡에 책이 쌓이는 것이 즐거웠어요. 제 지적 재산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사람은 남의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나 봐요. 저도 어느 시점부터 장르가 불분명한 이런 저런 글을 긁적이기 시작했지요. 하루는 점심시간에 식당으로 올라갔는데 입구에 ‘현문회 회원모집’이라는 공고를 보게 된 거에요. ‘현문회’는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조직한 문학회죠. 전문 강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회원들의 작품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합평하는 작은 문학 모임이었어요.

『늙은 사과』와 유정탁 시인

『늙은 사과』와 유정탁 시인

가끔 외부 강사를 초청해서 문학 강의를 듣기는 했지만 거의 독학이었어요. 그 당시 저는 잠잘 때 빼고는 늘 시집을 끼고 살았죠. 제게 가장 영향을 미친 작품은 신경림의 ‘농무’였어요. 제 시집 『늙은 사과』에 실린 작품 중에 그 때 쓴 것들이 많이 들어가 있죠. 그래서인지 당시 소재가 주로 노동자들의 삶과 애환이었어요.

제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서 시적 경향도 달라졌는데요. 1998년 IMF 때, 일없이 출근하는 상황이 이어졌지요.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정말 힘겨웠어요.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받았는데 저는 어색한 것과 불편한 것을 참기 어려워하는 성격이어서 대책도 없으면서 12년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죠. ‘실업 일기’는 그 때 썼어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얼굴이 많았다/가끔 쓴 쇠주잔 기울이던 더운 입김들 많았지만/부끄러운 발목은 오기만 남아있었다/ 정보지는 쌓여가고 밑줄 친 구인란을 두드릴 때마다 가방 끈 짧고 나이는 흘러넘쳤다/공돌이 십 년 이력 휴지처럼 구겨지고//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 많았다/계절마다 배낭 메고 네 바퀴 굴리며 떠나던 길은 너무 멀었다/지겹도록 오는 비 빨래 젖는 날 많고/잊을만하면 날아오는 청첩장 부고(訃告)에 괜스레 미안했다/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며 꽁초처럼 주눅 드는 나날/옛 출근길 함께 달리던 두 바퀴마저 떠나보내고/아내의 배는 보름달처럼 불러오고 있었다//

‘실업 일기’, 『늙은 사과』에서

두 번째 시집 『버드나무 여인』은 회사를 퇴직하고 나온 뒤에 쓴 것을 엮었어요. 회사에 다닐 때는 제 시야가 우물안 개구리였는데 퇴직을 하니 세상이 얼마나 넓게 보이는지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조기 퇴직이 저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시노래를 만드신다고 했는데, 본인이 시에 곡을 붙이시는 건가요?

곡은 제가 붙여요. 그러나 시는 제 것도 있지만 다른 시인의 시도 있습니다.

시인으로서 작곡을 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덧붙여, 작곡에 있어 가요와 시노래의 차이가 무엇인지 들려주세요.

작곡을 전공한 건 아니고요. 시를 많이 읽다보니 노래로 만들고 싶은 시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곡을 붙여보았죠.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쳤는데 아마 그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 그것에 재미가 붙어 독학으로 화성학과 편곡 등의 작곡 관련 공부를 했죠. 저는 무언가에 꽂히면 그것에 빠져들어요. 처음에는 제가 임의로 느낌이 와 닿는 다른 분의 시나 제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렀는데, 가끔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곡을 붙여달라고 부탁을 해오기도 하더군요.

『버드나무 여인』

『버드나무 여인』

시노래는 일반 대중가요하고는 많이 달라요. 가요는 비교적 가사가 단순하고 멜로디도 반복되기 때문에 귀에 쏙쏙 들어오고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도 쉽잖아요. 시노래는 서정시라도 시어가 일반 언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져요. 그래서 시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노랫말이 귀에 들어오도록 고쳐야 해요. ‘다시 한계령에서’는 무려 두 세장이나 되는 긴 산문시였죠. 제가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가사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노래 중에는 본인의 ‘슬도에서 만난 사랑’이나 박제상과 관련된 설화를 소재로 삼은 신혜경 시인의 ‘돌이 된 사랑’, 정연홍 시인의 ‘귀신 고래’ 등 주로 울산과 관련된 소재가 많던데 지역과 관련된 시노래가 의도적인가요?

시가 제 정서에 맞아서 선택한 것이겠죠. 김애령 씨가 부른 시노래1집 음반 『슬도에서 만난 사랑』도 나왔는데 음반출시 기념으로 지난 해 4월에 중구문화의 전당에서 시노래 공연도 했고, 올해 1월에는 서울 대학로에 있는 ‘이음아트홀’에서 콘서트도 했어요. 다른 지역으로도 공연을 많이 가요. 지난 7월 17일에는 울산시낭송협회 주관으로 슬도에서 시노래 마당을 마련했어요. 시노래가 ‘슬도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죠.

출판사 '작가시대'도 경영하신다고 했는데, 시 쓰랴 노래 만들랴 무척 바쁘실 것 같네요. 어떻게 경영하게 되신 건가요?

제가 실업자로 있을 때, 복지관 소식지나 문예지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경험이 출판업에까지 발 디디게 된 배경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책을 많이 읽다보니 어떤 책이든지 손에 들게 되면 느낌이 와요. 종이 질, 독자들이 글을 읽을 때, 산만하지 않고 편안하게 읽히는지, 책장은 잘 넘어가는지 등이요. 잘 만들어진 책은 이 모두가 충족이 되거든요.

시인 유정탁

유정탁 시인

그런데 문학계에 발 디밀고 있다 보니 지역의 참 많은 문예지나 책을 받게 돼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책들은 뭔가 엉성하고 복잡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요. 그래서 스스로 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출판을 하려면 많은 일손이 필요하죠. 그런데 저는 웹 디자인을 비롯한 다양한 디자인 프로그램을 공부해 왔는데 이런 작은 능력 덕분에 출판이라는 분야에 일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읽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책을 만들려고 해요. 이게 쉬운 것 같지만 만드는 사람의 감각이 필요해요. 종이 결이나 자간과 행간, 글자체, 책의 여백 등, 이런 것을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의 책이 나오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이맘때쯤이면 시심(詩心)이 생겨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시인은 타고 나는 건가요? 시를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한마디 해주세요.

몇몇 천재시인을 제외하고는 노력으로 된다고 생각해요. 시인이 되고 싶다면 ‘젖어 있는 걸레가 되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시가 되는 것들은 순간성이 있어 그 때 그것을 잡지 않으면 사라져버려요. 그렇게 시가 되는 것들을 위해 항상 시에 젖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밥 먹고 잠잘 때 빼고는요. 모든 사물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죠.

시인의 눈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소재가 돼요. 그것을 잡고 표현하면 시인이 되는 거고, 흘려버리는 사람은 일반인이죠. 안 쓰는 칼은 녹이 슬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처럼 시심을 지니고 있어도 갈고 닦지 않아서 시인이 못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시창작 강의를 나가는 ‘옹기종기 도서관’ 시창작반 회원 평균연령이 60대에요. 나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시인으로서 작곡가로서, 그리고 출판까지, 하시는 모든 일이 순조롭고 많은 발전이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감이가 만난 유정탁 시인은 부끄러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는데 다른 사람의 세 배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속시원히 말하지 않아 쓸 게 없다고 투정하는 다감이에게 그제야 아주 조금 자신의 활동을 말해주는, 기자로서는 속이 터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많은 이력에도 불구하고 첫 시집 날개에는 ‘경남 출생으로 1998년 전태일 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 문장뿐입니다. 두 번째 시집에는 ‘시집으로 『늙은 사과』가 있다.’를 덧붙였을 뿐입니다. 그는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불편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도 눈에 띄지 않은 뒷자리에 앉아 음향기기를 만지작거리는,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에서 기르던 염소를 팔러 장에 갔던 것을 가장 큰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 아직도 그 때 염소 팔아 손에 쥔 돈이 4만 5천이었다고 말하며 눈자위가 붉어지는 사람. 자신이 지도한 사람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 참 뿌듯했다고 말하면서도 늘 제자들에게 자신은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이라고 조용히 말하는 사람. 시인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워 굳이 ‘시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내면은 꽁꽁 감춘 채 외면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자신을 부각시키려 SNS에 뭘 먹었는지 어딜 갔는지 소소한 일상이라도 올려 ‘나 이런 사람이야’를 외치다가도 속살을 드러내는 데는 ‘나에게 다가오지 마!’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곤두세우고, 세울 가시가 없는 사람은 얼굴에 구두약이라도 발라 ‘접근금지’를 외치는 세상에서 속살을 온통 드러내고도 더 드러내지 못한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그는 세상을 거꾸로 사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시집 맨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시인의 말’로 이야기를 맺겠습니다.

유정탁 시인

유정탁 시인

시 쓰는 밤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홀딱 벗고 다가가지 못함을 고백한다// 시 쓰는 일은 내 안의 때를 밀어내는 일/덕분에 내 낯짝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거겠지)// 마른멸치 상자 속에서/무심코 멸치 한 마리를 집어들자/무리 속에 있을 때 보지 못한/멸치 한 마리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내가,/세상으로 나가는 내 시가/ 한 마리 멸치 같다//

- ‘시인의 말’, 『버드나무 여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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