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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예술인 '장창호’를 만나다

다감이 윤경희

다감이 윤경희

공연사진

느껴지나요? 뺨을 스치는 바람에 따뜻한 기운이 살짝 묻어있는 것이.
보여요? 양지쪽 마른 잎들 제치고 뾰족 얼굴 내민 새싹이.
들려요? 태화강 물소리가 좀 더 경쾌해졌네요.
우리는 곧 만져볼 수 있겠네요. 맛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문화예술의 봄을.

3월을 맞이해 이번에 저희 다감이는 울산 문화예술에 봄기운을 가득 불어넣으려 애쓰고 계신 극작가이자 연출가, 장창호님을 만났습니다.

연출가 장창호님연출가 장창호님
다감이 윤경희(윤) :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장창호(장) : 저는 극작가이며 연출가 그리고 인문학 강사로 살아가는 장창호입니다.

윤: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활동경력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장: 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그 때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을 하면서 연극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외국번역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그것이 안타까워 작품을 직접 쓰게 되었고, 군에서 제대 하고 처음 쓴 희곡이 1984년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서울 ‘롯데월드예술극장’에서 시나리오 작가 겸 PD로 직장생활을 했고, 서른일곱 살에 울산에 내려와 소극장 ‘이솝’ 운영, 아동극단 ‘이솝’, 뮤지컬 극단 ‘문화가족 길’, 장애인극단 ‘소나무’, 그리고 어르신과 학생들로 구성된 연극단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7년을 공들인 뮤지컬 극본 ‘장창호 삼국유사 전12권’을 2014년에 내놓았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건강한 삶’에 대해 고민하며 나누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윤: 말씀을 듣다보니 궁금해졌어요. 한창 활동할 시기에 울산으로 내려오신 이유가요.

장: 당시 저는 서울에 직장이 있었고, 아내는 지리산 자락에서 교직생활을 했습니다. 아들이 유치원 들어갈 무렵, 가족과 함께 살고 싶었어요.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양보해야 하는데 각자의 꿈이 있으니 쉽지 않았죠. 할 수 없이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제가 졌어요. (웃음) 그런데 사실 제가 진 것이 속으로는 반가웠습니다. 결혼하면서 아내와 약속했어요. 마흔까지만 직장에 다니고 이후에는 고향인 울산에 내려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했었는데, 그것이 삼 년이나 앞당겨졌잖아요.

극단공연사진극단 공연장면
윤: 극단의 단원 대부분이 장애인, 고령자, 어린이, 대안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는데요.
이들을 중심으로 연극을 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장: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죠. 저는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소외계층은 창조와 누림 어느 쪽에도 속하기 어렵죠. 그렇다 보니 자신을 엑스트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이들이 무대에 서보는 것으로 자신감을 회복하길 바랐어요. 물론 연극을 올리기까지 수많은 난관이 있었죠. 장애인극단의 경우는 무대에 올리기까지 일 년이 걸려요. 고생한 만큼 그들이 누리는 기쁨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직접 ‘울산아리랑’의 노랫말을 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울산아리랑’ 사설은 전통 아리랑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울산아리랑’을 짓게 된 배경과 그 속에 담고 싶었던 생각은 무엇인가요?

장: 아리랑은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독립군아리랑’, ‘광복군 아리랑’ 등도 있습니다. ‘울산아리랑’은 현재 16수로 목적성이 있죠. ‘울산소리진흥회’ 박현성 원장께서 제안을 하셨고 제가 동의를 해서 만들어졌는데, 울산 12경을 소재로 울산사람의 정신을 담고자 했습니다.

극단공연사진울산아리랑제 사진

사설은 현재를 바탕에 두고 울산의 역사와 미래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를테면 병영 언양 남창 독립만세 가사 등은 지역의 역사를 담아 미래의 좌표로 삼으려고 했죠. 울산에 뿌리 내린 사람들 모두가 지역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울산아리랑제 공연을 통해 ‘울산아리랑’을 알리는데 힘쓰고 있지만 언론에서도 홍보에 힘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울산아리랑’이 ‘울산아가씨’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친숙해졌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지요.

윤: 울산의 문화를 이끌고 창조하는 예술인으로서 한계를 벗어나 소통한 일이 있다면 한 가지 소개해 주세요.

장: 지역문화와 중앙문화를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지만 소통은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제가 IMF때를 배경으로 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작품을 서울에 있는 ‘알과 핵 소극장’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당시 단원 전체가 일주일을 숙식하며 하루 한 차례, 주말에는 두 차례 올렸습니다. 비용이나 성공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시의성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에서 한 행군이었죠. 2003년과 2004년에는 어르신들로 구성된 연극을 만들어 일본, 중국을 방문해서 공연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라도 달려가 올리고 싶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공연장면'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공연장면
윤: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장: 저는 ‘가난한 연극’을 추구합니다. 요즘은 연극보다 뮤지컬이 대세인데, 그것들은 매우 화려하죠. 저는 ‘장식이 많으면 소외된 사람’들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뮤지컬은 결국 비용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요. 평창올림픽에서 뜬 컬링선수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시작은 참으로 단순했습니다. 그들이 세계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장식이 많아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문화보다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그들 모두가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작은 무대를 상관하지 않고 관객과 만날 것입니다.

윤: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장창호님과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따뜻한 봄을 기다리면서 향기 나는 연극 한 자리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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